방명록

논픽션 단편소설 <생명굿을 다녀와서>

연구원 0 388
<글쓴이의 요청에 의해 내용 중 개인정보와 관련된 부분을 다소 수정하고 익명으로 올립니다.>

#1. 화요일
법정공휴일이지만 회사에 있다. 딱히 할일은 없지만 준비 중인 프로젝트의 오픈이 얼마 남지 않아, 팀원들을 휴일 출근 시키고 나도 나와 있는다.
저녁까지 인터넷 서핑으로 시간을 떼운다. 와이프한테 전화가 왔다. 지인중에 안좋은 일이 생겨서 애들하고만 있기 무섭다고 빨리 들어오란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에 와서 무슨일이냐고 물어봤다. 자기 초등학교 동창이 남편한테 칼에 찔려서 죽었다고 한다.
'XX 아내 살해' 라고 인터넷에 검색어를 치니, 바로 수십개의 기사가 나온다.
- 귀가 늦는다 부부싸움 중 아내 흉기로 살해….
- "왜 늦게 귀가해" 남편 부부싸움 중 아내 살해….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고, 아내 역시 어렸을 때 보고 왕래가 있던 사이는 아니라서 그렇게 큰 감흥이 없다.
애들이 들을까바 더 깊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맥주 남은거 없어?” 한잔하고 자야겠다. 낼 출근하려면...
 
#2. 수요일
인사발령이 나서 회사가 어수선하다.
X팀 전원이 권고 사직을 당했다. 3명 밖에 없는 작은 부서였지만, 예전에 모두 같이 일한 적이 있었던 동료들이다.
한명은 임신 중이고, 다른 한명은 용인에서 1시간 30분 넘는 거리를 오가던 여직원이다.
그런데 용인에 사는 여직원이 문제가 되는 것 같았다.
"송XX씨, 사직서에 싸인 안했다는데?"
같이 담배 피우던 옆 팀 박팀장이 계속 이어서 말한다.
"걔가 보기보단 독해서, 아마 버티기로 작정했나봐. 인사부장 골치 좀 썩힐걸." 그러면서 웃는 표정이 정말 징그럽다.
예전 팀원들이 해고 된다는 소식이 기분 좋지만은 않지만, 딱히 나랑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건은 아니기에 담배 두 개피 피는 동안 좆같은 회사 욕이나 하고 마무리 됐다.

#3. 목요일
사직서를 안쓰고 버틴 송XX씨는 대기발령이 났다.
갑자기 사장한테 호출이 왔다. 정중하게 인사하고 사장실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왕차장, 송XX씨, 예전에 니네가 뽑은 애지?"
이 짧은 말 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오른다.
아, 상관 없는 일이 아니었구나...
3년전이라도 내가 뽑은건 뽑은거니까, 책임이 나한테 오는건가...
그 씨발년은 왜 안나가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거지...
사장은 나의 그럴싸한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말을 이어 나갔다.
"송XX, 걔 보통 애가 아닌것 같네. 일도 없는 상태에서 그 만큼 회사가 편의를 봐줬으면, 은혜를 알아야지. 이렇게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하나."
다행히도 더 이상의 추궁은 없었다. 대신 앞으로 사람을 뽑을 때, '인성'을 잘 보고 뽑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4. 금요일
대기발령이 난 송XX씨는 결국 하루만에 사직서에 싸인을 했다.
사장실 바로 옆자리, 아무것도 없는 빈 책상에서 하루를 있다가 나갔다.
총무실 사람들한테 "치사해서 나간다, 더러운 회사 얼마나 잘되나 한번 보자" 라고 울면서 나갔다고 한다.
부사장, 부장 2명과 저녁을 먹으러 중국집에 왔다.
"김부장님, 송XX 하루만에 그만둬서 한시름 놨겠어요. 소송이라도 걸면 골치 아팠을 텐데.."
재무팀 부장이 징그럽게 웃으면서 인사부장한테 고량주 한잔을 따라준다.
인사부장은 아무 말이 없다. 나도 가만히 앉아서 이름도 생소한 라조기 한조각을 집어 먹는다.

#5. 토요일 대전으로 가는 KTX를 탔다.
이번 주에는 아내의 동창이 살해 당했고, 그 동창의 아이들은 엄마를 잃었고, 아버지는 구속되고,
용인에 사는 여직원은 실직을 당했고, 인사부장은 소송까지 갈 수도 있던 상황을 무사히 넘겼다.
물론, 그 외에도 자잘하고 짜증나는 일들이 매일 있었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간만에 주인공 되어서 맘껏 소리 지르고, 몽둥이 질 하고, 술이나 실컷 먹고 와야겠다는 생각 뿐이다.
 
#6. 월요일
오늘은 회사가 조용하다. 사장이 출장 갔다는 얘기가 돈다.
"차장님, 목소리가 왜 그렇게 잠겼어요?"
업무 지시를 하던 중에 윤 과장이 내게 말한다.
토요일 생명굿 주인공의 후유증이다.
"결국엔 갔다 오셨네요. 그래서 힐링은 좀 됐나요?"
"그럼! 몸은 힘들지만, 정신은 리프레쉬 됐지!"
"글쎄요. 그 버프가 몇 일이나 갈까요. 헤헤헤"
(버프: 게임속 용어, 게임 속 캐릭터가 마법이나 약을 먹고 치유되는 효과)
씨발놈, 말 한번 참 찰지면서 싸가지 없게 한다. 아까 쓰다 말았던 업무 메일을 다시 끄적인다.

제목: XXX팀 여름 휴가 계획 취합의 건
내용:
현재 전 부서별로 조사 중인 각 팀 여름 휴가 일정 계획과 관련하여 회신 드립니다.
저희 XXX팀은 이번에 준비 중인 XX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하여, 26명 팀원 전원이 여름 휴가를 반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저희 팀원 전원은 분골쇄신, 최선을 다하여..............

<끝>

Comments

게시판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